• 최종편집 2026-04-18(토)
 

역사는 가끔 잔인한 농담을 건넨다.

민주주의의 종주국을 자임하는 미국에서,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가장 위협하는 인물이 다시 권좌에 올랐다. 트럼프는 이란을 향해 칼을 겨누고, 동맹을 흥정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세계 경제를 공황의 벼랑으로 몰아가고 있다. 유가가 폭등하고 금융시장이 패닉에 빠지는 이 모든 장면이 민주주의라는 이름 아래 합법적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2400년 전 아테네의 어느 철학자가 이 장면을 보았다면 분노하거나 탄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조용히 빈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그가 평생을 바쳐 경고한 바로 그 장면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재연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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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백악관]

플라톤의 생애를 관통한 것은 단 하나의 사건이었다. 기원전 399, 스승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셨다. 죄목은 "청년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모독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판결을 내린 것은 독재자가 아니었다. 501명의 시민 배심원이었다. 아테네 민주정의 합법적 절차가, 그 시대 가장 빛나는 정신을 합법적으로 지워버린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죄는 사실 하나였다. 시민들이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음을 끊임없이 일깨우려 한 것. 자신들의 무지를 폭로하는 자를 군중은 끝내 용납하지 못했다. 플라톤은 그 장면을 목격한 뒤 정치가의 꿈을 내려놓았다. 대신 평생을 그 하나의 죽음에 대한 고발로 바쳤다. 국가, 정치가, 법률도 결국 그 길고 긴 고발장의 각 장()이었다.

 

그가 아테네의 직접민주제를 우민정치라 규정한 것은 귀족적 편견에서 흘러나온 말이 아니었다. 광장의 열기가 이성을 어떻게 녹여내는지, 선동의 언어가 진실의 언어를 어떻게 짓밟는지, 다수결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얼마나 매끄럽게 작동하는지를 그는 스승의 죽음으로 온몸에 새겼다. 국가에서 내세운 철인왕(哲人王)은 실현 가능한 대안이 아니었다. 군중에게 유린당하는 민주정의 민낯을 도려내어 보여주기 위한 철학적 해부도였다.

 

역설은 여기서 시작된다. 플라톤이 그토록 혐오한 민주정은 그의 비판을 오히려 자양분으로 삼아 진화했다. 대의제를 고안하고, 삼권을 분립하고, 헌법으로 다수의 횡포를 틀어막는 제도적 완충재를 켜켜이 쌓아올렸다. 플라톤의 저주를 교정 명령으로 받아들인 민주주의 2000년 자기수정의 결과물이었다. 인류는 그렇게 우민정치의 심연을 제도의 힘으로 가까스로 버텨왔다.

 

그 완충재를 21세기가 송두리째 허물었다.

 

소셜미디어는 플라톤이 두려워했던 아고라의 군중심리를 광속으로 복제하고 무한 증폭시켰다. 알고리즘은 시민을 저마다의 분노 속에 격리시키고 진실과 허위의 경계를 마침내 녹여 없앴다. 복잡한 진실보다 단순한 적의가, 전문가의 소신보다 군중의 환호가 더 큰 힘을 갖는 시대가 열렸다. 숙의와 이성이 설 자리를 분노와 자극이 빼앗아버린 시대, 민주주의의 형식은 살아 있되 그 정신은 껍데기만 남은 시대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트럼프는 그 시대의 산물이 아니었다. 그 시대의 완성이었다. 그는 군중의 욕망을 읽는 데 있어 천부적 감각을 타고났고, 분노를 연료 삼아 민주주의의 엔진을 역방향으로 돌리는 법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복잡한 중동의 현실은 그에게 장애물이었고, 국제법은 사치였다. 오직 감정의 파고를 얼마나 높이 끌어올리느냐, 그것만이 그의 전략이었고 그 전략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탄핵을 당하고 법정에 서면서도 오히려 지지율이 오르는 역설, 거짓이 드러날수록 군중이 더 열광하는 현상그것은 소크라테스를 독배로 이끈 아테네 광장의 21세기 판본이었다.

 

플라톤이 절규했던 우민정치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었다. 첨단 기술의 화려한 옷을 걸치고 21세기의 한복판에 당당히 귀환한 것이다.

 

그렇다고 플라톤의 처방전을 다시 꺼내 들 수는 없다. 역사는 이미 그 답을 피로써 보여주었다. 스스로를 철인왕이라 확신한 자들이 20세기에 얼마나 깊고 넓은 무덤을 팠는지를. 히틀러도, 스탈린도, 마오쩌둥도 스스로가 철인왕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자들이었다.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되, 그 불완전함을 스스로 직시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체제다.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그릇이 아니다. 그 안을 채우는 시민의 질()이다.

 

바로 그것이 플라톤이 필생의 저술로 끝내 말하고자 했던 핵심이기도 하다.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지 못하는 시민, 선동과 진실을 구별하지 못하는 유권자, 분노를 판단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는 군중그 위에 세워진 민주주의는 언제든 소크라테스의 재판정으로 되돌아간다. 아테네가 그 첫 번째 증거였고, 오늘의 워싱턴이 두 번째 증거다. 이 교훈을 외면하는 한, 세 번째 증거는 반드시 어딘가에서 또 만들어질 것이다.

 

트럼프는 민주주의의 실패가 아니다. 트럼프는 민주주의의 자화상이다.

 

플라톤의 저주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깨어 있는 시민 없이 민주주의는 제 살을 파먹는다. 그 냉혹한 진실 앞에 정직하게 서지 못하는 한, 트럼프 이후에도 또 다른 이름의 트럼프는 반드시 돌아온다. 2400년 전 플라톤이 빈 미소를 거두지 못한 채 눈을 감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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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라는 플라톤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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