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청제비, 56년 만에 국보 지정 예고
신라 제방 관리의 산 증거
경북 영천시에 위치한 신라시대 비석 '영천 청제비'가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된다. 1969년 보물로 지정된 지 56년 만이다. 국가유산청은 지난 2일, 신라의 제방 관리 체계와 자연재해 대응 과정을 보여주는 이 비석을 국가지정문화유산 국보로 지정할 계획임을 공식 예고했다.
[경북 영천시 청제비 사진=국가유산청]
"영천 청제비는 한반도 고대사의 공백을 메우는 생생한 증언자입니다." 국가유산청 문화재분과 김태준 위원장의 말이다. 그는 "신라의 토목기술과 국가 관리체계를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유일무이한 사료"라며 국보 승격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청제비는 신라 법흥왕 23년(536년)에 축조된 저수지 '청못' 옆에 세워진 비석으로, 자연석에 직접 글자를 새긴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비석은 받침돌이나 덮개돌 없이 세워졌으며, 앞면에는 저수지 건립 사실과 공사 규모, 동원 인원 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뒷면에 원성왕 14년(798년) 제방 수리 공사에 관한 내용이 추가로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한 비석에 시기를 달리하는 두 개의 비문이 각각 기록된 사례는 극히 드물다.
조선 숙종 14년(1688년)에는 파손된 비석을 다시 세운 '청제중립비'가 추가로 건립됐다. 이는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천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청제비와 청못이 지역민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청제비의 가장 큰 가치는 1,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원위치에서 보존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영천 역사문화연구소 박민철 소장의 설명이다. 그는 "비석이 세워진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있으며, 비석이 관리하던 청못도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영천 청제비는 신라시대 정치·사회·경제 상황을 연구할 수 있는 1차 사료로서 의미가 깊다. 비문에는 제방 건립과 수리 과정, 동원된 인원, 왕실의 관리·보고 체계 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어, 삼국시대 국가 운영과 재난 대응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청제비 비문을 통해 신라 정부가 수리시설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관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성민 연구원의 말이다. 그는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한 국가적 노력과 함께, 자연재해에 대응하는 위기관리 체계까지 확인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번 국보 지정 예고는 30일간의 의견 수렴 기간을 거친 뒤, 문화유산위원회 심의를 통해 최종 확정될 예정이다. 국가유산청은 "앞으로도 문화유산의 숨겨진 가치를 재조명하고, 합리적인 지정 제도가 정착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영천시는 청제비의 국보 승격을 계기로 주변 정비와 함께 새로운 관광 프로그램을 개발할 계획이다. 영천시 문화관광과 최영호 과장은 "청제비가 국보로 최종 지정될 경우,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추진할 계획"이라며 "청제비를 중심으로 영천의 풍부한 역사문화 자원을 국내외에 알리는 기회로 삼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영천 청제비의 국보 지정이 신라시대 토목 유산과 기록문화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지방 소재 문화유산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의미 있는 시작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